기독교/신론연구

3주차_신론연구

s학장 2021. 9. 15. 11:33

신론 강의 2.

https://youtu.be/DSRbiOumTCc

고전적 유신론과 그 비판

 

1. 고전적 유신론(classical theism).

 

전지, 전능, 영원, 무궁, 편재, 거룩하신, 하늘 저 높은 곳의 하나님.

 

1) 전통적 유신론(traditional theism), 철학적 유신론(traditional theism)혹은 그냥 유신론(theism)이라 부르기도 한다.

 

2) 성경과 그리스 사상(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아래 형성된 신이해.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피터 롬바르드 등.

 

피터 롬바르드(Peter Lombard): 하나님의 속성에 이르는 탁월성의 길부정의 길.’

 

탁월성의 길(via eminentia/ the way of eminence):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에 하나님과 유사한 부분이 있어서 인간의 선하고 아름다운 부분을 최고로 확장한 것이 하나님의 속성일 수 있다.

- 우리 인간들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전지), 우리 인간들은 약간의 능력이 있지만 하나님은 모든 일에 능하시다(전능). 이런 식으로 하여 하나님은 전지, 전능, 거룩, 사랑, 자비, 지혜 등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간주되었다.

 

부정의 길. via negativa/ the way of negation: 인간의 부정적인 측면을 부정한 것이 하나님의 속성이다.

 

단순성- 인간은 복잡하고 분열되어 있지만 하나님은 (이를 부정한) 순수한 신적 단순성을 그 속성으로 갖고 계신다.

 

불변성- 인간은 변할 수밖에 없는 존재지만 하나님은 불변성을 갖고 계신다.

 

영원성- 인간은 유한하나 신은 영원하다.

 

무소부재성(편재성)- 인간은 장소에 제약되지만 신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

 

독립성- 인간은 의존적이지만인간의 의존성을 부정한 독립성(자존성)을 그 속성으로 갖고 계신다.

 

그래서 이런 신 인식의 방법에 의하면 하나님은 전지, 전능, 편재, 영원, 완전, 불사, 불변, 무감동 같은 속성을 지닌 분, 곧 천상에 높이 계신 영원한 절대자로 이해된다. 물론 사랑, 긍휼, 자비와 같은 속성들도 하나님께 속하나 이런 것들은 앞의 속성들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 된다.

 

- 이를 이미지로 표현하면 하나님은 아버지이자 왕이고 심판자로 이해된다.

 

 

3) 현대신학에 와서 이런 유신론적 신이해는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1) 유신론적 신 이해는 상식적이고 철학적인 신 이해이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를 나타내신 하나님에 대한 이해라고 하기 어렵다.

 

 

(2) 유신론이 말하는 천상에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자유 및 주체성과 충돌하게 되고 기독교를 인간의 자유와 주체성을 부인하는 종교로 오해 하게 만든다. 실제로 18 세기 이후 서구 사회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급속히 약해진 것은 이런 유신론적 신 이해가 자유와 평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게 된 서구 세속 사회에서 갈수록 설자리를 잃어갔던 것과 연관되어 있다.

 

 

(3) 영원히 초월해 있는 유신론의 하나님은 인간의 구체적인 일상생활과 아무 관계가 없고 따라서 무의미하다. 특히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자연법칙이 발견되고 세계가 설명 가능한 것이 될수록 하나의 설명 가설로서의 하나님의 자리는 약화되어 버린다.

 

 

(4) 유신론은 아버지, 남성, 군주로 표상되며 이런 하나님 이해는 결국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종교적으로 정당화 하게 된다. 여성 신학자 메리 델리(Mary Daly)는 이를 하나님이 남성이면 남성이 하나님이다(If God is male, male is God)”라고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5) 유신론적인 신 이해는 하나님의 전능과 이 땅의 악과 고통의 문제의 관계 곧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의 문제를 거의 답변 불가능한 과제로 만들어 버린다. 아울러 무신론의 도전 앞에 설득력 있는 답을 줄 수 없게 된다.

 

 

 

신론연구 3.

 

무신론과 그 이유

 

 

1) 무신론 주장의 이유들

사람들은 왜 무신론을 주장할까? 주된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1) 어떤 사람들은 신을 인간 욕망이 빚어낸 환상이라 하여 무신론을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이미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크세노파네스(Xenophanes)의 다음의 말에서 발견된다. “말이 소나 사자가 손이 있어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그것들이 그리는 신은 소나 사자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이디오피아의 신은 얼굴이 검고 들창코를 하고 있고, 트라키아인의 신은 파란 눈을 하고 있다.”

 

근대 들어와 이런 주장을 가장 분명하고 영향력 있게 제시한 이는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이다. 그는 신이란 인간 욕망의 투사이며 신적인 특성이라 여겨진 것은 사실상 인간의 최고 특성들의 반영에 불과하기에 인간은 무신론을 통해서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다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포이에르바하, 기독교의 본질강대석 역 (서울: 한길사, 2008) ).

 

흔히 투사이론(projection theory)이라 불리는 이런 주장에는 일말의 진리가 있다. 포이에르바하의 말처럼 우리의 하나님 이해에는 참 하나님의 모습 아닌 우리의 경험(특히 아버지에 대한 경험)이나 희망 사항이 투영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하나님 경험이 모두 인간 경험이나 욕망의 투사는 아니다. 이는 마치 열애에 빠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소망을 투사하여 사랑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는 연인의 실제 모습과 동일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연인이 실재하지 않는 것은 아님과 같다. 따라서 투사 현상이 있다고 해서 실체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어떻게 보면 투사도 실체가 있어야 생긴다.

 

 

(2) 어떤 사람들은 과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인간 사회와 자연 세계의 신비를 설명하기 위해 신을 필요로 했지만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인간과 세계를 신과 초월 없이, 곧 철저히 역사 내적 원리 따라 자연주의적으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신이나 신에 대한 언어는 무의미하게 되었다고 무신론을 주장한다. 이 경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불필요한 것으로, 무신론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런 주장 역시 나름의 진실을 포함하고 있다. 철저히 초월적 존재이기만 하거나 이 세계의 비밀을 설명하기 위한 설명 가설로서만 요청되는 하나님은 엄밀한 객관성과 가치중립성을 주장하는 과학 기술의 발달과 함께 설자리를 잃어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과학적 탐구 역시 정녕 가치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작업인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과학은 관찰과 실험의 결과를 중립적으로 정리하여 거기에 따른 이론을 만들어 내고 다시 그 이론을 경험적 자료로 검증하는 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발전해 가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오늘날의 과학철학은 과학 역시 이미 특정한 전제를 세운 다음 그 전제를 검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짐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때의 전제는 물론 유물론적이며 자연주의적인 전제이다. 곧 과학 탐구는 세상의 모든 것은 신이나 초월 없이 탐구될 수 있고 또 탐구되어야 한다고 미리 전제하고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은 성격상 이 모든 것을 초월해 있는 하나님이 계심을 입증할 수도 없고 부인할 수도 없다. 만일 과학이 하나님의 존재를 찾아낼 수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놀라운 일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여전히 과학도 신비적 체험도 영적 직관도 미치지 못하는 세계의 신비’(에브하르드 융엘)로 남아 있다.

 

 

(3)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의 수많은 악과 고난으로 인해 무신론을 주장한다. 이들은 선하고 전능한 하나님이 있다면 왜 세상에는 악이 가득하고 의로운 자는 고난을 당하느냐고 묻는다. 평생을 무신론자로 살다가 생의 마지막을 유신론자로 마친 철학자 앤서니 플류(Anthony Flew)는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대변한다. “어떤 이들은 아버지가 그의 자녀들을 사랑하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위로를 받는다. 그런데 우리는 수술로도 고칠 수 없는 후두암으로 죽어가는 어린이를 보고 있지 아니한가? 그 아이의 세상 아버지는 극도로 초조하여 아이의 치료를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지만 하늘의 아버지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무신론을 옹호하는 목소리 중 가장 설득력 있게 신 신앙에 도전하는 것이 바로 이런 설명하기 어려운 고통의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하나님의 근본적인 성품이 사랑이라는 점과 하나님은 그 사랑으로 인해 피조 세계에 자유의지를 주셨지만 인간과 세계가 이를 잘못 사용한 결과 악과 고통에 빠지게 되었고 따라서 이는 하나님 아닌 우리 인간들의 책임이라고 답할 수 있다.

 

(4)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거부한다. 철학자 싸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자유이기에 삶의 기준과 원리는 인간 외부에서 와서 안 되고 각 사람이 가장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그 뜻대로 주관하는 신이 있다면 인간은 결코 자기 삶의 주인으로 자유로울 수 없기에 신과 신에 대한 신앙은 거부되어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에른스트 블로흐 역시 동일한 이유로 신에 대한 신앙을 거부한다. “세상의 위대한 주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자유를 위한 여지가 없으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자유마저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무신론을 통해서만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런 주장 역시 일말의 진실을 지니고 있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자유 없이 인간일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자유에는 방향이 있다. 곧 자유가 인간 삶에 필수적이지만 그것이 자신을 중심에 두는 자기중심적 자유인가 아니면 진리와 생명의 원천과 조우함으로 진정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 하나님과 이웃과 세계를 섬기는 자유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기독교 신앙은 사람이 자신의 창조주이자 구속자인 하나님을 만날 때 비로소 자유로운 존재가 되며 인간과 현대 문명이 위기에 봉착한 것은 하나님 아닌 자기중심주의에 사로잡혀 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14:6).

 

(5) 어떤 사람들은 유신론적인 전통이 사회의 불의와 거짓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정의로운 사회 건립의 길을 막고 있다고 하면서 인본주의적인 무신론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마르크스는 산업 혁명으로 야기된 숱한 사회 문제에 교회가 거의 관여치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문제 해결에 방해가 되었을 뿐이라고 분노한다. 싸르트르와 까뮈 역시 1940년대와 50년대의 교회가 사회악을 간과하고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이끌던 극우 민족주의를 오히려 축복했음을 지적한다. 지난 세대의 탁월한 인본주의자인 버트란트 러셀은 이런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다소 과도한 비난을 퍼붓는다. “기독교는 교회로 조직된 때부터 이 세상의 도덕적 발전에 중요한 적이었으며 지금도 적으로 남아 있다.”

이런 주장 역시 일말의 진리를 품고 있다. 복음이 제대로 선포되고 실천된 곳에서는 언제나 개인의 갱신과 사회의 변혁이 일어났으나 역사 속의 교회는 곧잘 하나님의 이름으로 잘못된 사회 질서를 정당화했고 악을 선이라고 말해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복음 아닌 교회의 죄악과 불순종의 결과이며 이런 점에서 교회는 버트란트 러셀 같은 무신론적 인본주의자들의 비판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이들은 복음에서 멀어져 있는 교회의 회개를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세속화 시대의 예언자일 수 있는 것이다.

 

 

(6) 마지막으로, 오늘날 가장 강력한 무신론적 도전은 진화생물학에 근거한 호전적 무신론 운동에서 발견된다. 리처드 도킨스나 다니엘 데넷은 신이란 관념(the idea of God)’은 사람들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진화 과정을 견디어내어 종족 번식에 성공하도록 유전자가 만들어낸 일종의 생존 메커니즘이라고 비판한다. 다시 말해 종교는 사랑의 하나님이 있어서 현세에서는 돌보아주고 내세에서는 심판과 보상을 하신다고 믿게 함으로서 힘든 세상을 견디어 내도록 도와주는 데 이는 실상 유전자가 만들어내는 책략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도킨스 등은 이를 과학적 근거가 있는 주장인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과학 탐구가 관찰이나 실험을 통해 재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새로운 발견들에 의해 계속 수정되고 보완되어가는 계속적 과정이라면 인간의 신 관념이 유전자의 생존 책략이라는 주장은 입증도, 논박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결코 과학적 진술일 수 없다. 성격상 이는 무신론적이며 유물론적인 진화 사상에 대한 선언, 곧 일종의 세계관적 주장이다. 문제는 이런 주장이 과학적 권위를 가진 것처럼 보이기에 유신론적 세계관은 개인적인 선택과 취향의 문제이고 유물론적 세계관은 믿을만한 과학적 사실이라고 여겨지게 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주요한 무신론적 주장과 거기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응답을 살펴보았다. 여기에 덧붙여 우리는 무신론자들이 공격하는 하나님 상이 사실상 전통적인 유신론의 신이해 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곧 거의 대부분의 무신론자들은 저기 하늘 위에 있는 초자연적 존재로서의 신성을 기독교 신앙의 신 이해라고 여기면서 이를 비판하고 부정하려고 하지만 이는 공격의 대상을 잘못 잡은 것이다. 네덜란드의 개혁주의 신학자인 헨드리쿠스 벌코프(Hendrikus Berkhoff)는 무신론자들에 의해 거부된 신성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세계 밖의 저 위에있는 하나님이며, 우리가 논증을 통해 그 실재를 규명해야 하는 형이상학적인 실재이자 자연 신학의 신이며, 스콜라주의에서 말하는 지고의 존재이지만,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그와 전혀 다른 하나님, 곧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며, 피조물의 아픔에 동참하시는 하나님이며 이런 하나님은 결코 무신론에 의해 상처입지 않는다고 정확하게 표현한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 무신론에 대한 가장 적극적이고 강력한 응답은 결국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온전히 계시하신 하나님을 더욱 분명하게 알고 명확하게 제시하는 데 있을 것이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을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벧전 3:1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