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재세례-메노나이트의 역사와 연구사 서평자료
종교개혁운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해 반기 를 들었던 프로테스탄트라고 해서 모두가 주류 종교개혁자들 즉, 루터, 츠빙글리 그리고 칼뱅이 제시한 대안들에 환호만 한 것은 아니었다. 종 교개혁운동들에도 온건파와 과격파, 그리고 중도파 등 여러 유파가 존 재했다. 처음에는 동료들이요 동역자들이었던 이들이 비판자에서 직 대자로 바뀌어 자기들 나름의 대학운동을 형성했다 하겠다. 칼슈타드 (Andreas von Karlstadt)와 뮌처는 1520년대 초에 루터에서 분리해 나갔고 그 레벨(Conrad Grebel)과 스위스 형제단은 1523년 츠빙글리의 개혁 속도와 정도에 불만을 갖고 츠빙글리와 관계를 단절했다! 그리고 칼뱅이 직접 천거해서 세웠던 카스텔리옹(Sebastian Castellion)은 칼뱅과 칼뱅주의의 독 재에 대해 지성적으로 맞섰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분리주의자로 낙인찍힌, 즉 개야 종교개 핵운동가들(dissen)은 전통적으로 '급진 종교개혁운동가" "종교개혁 동의 서자(Seitfinder der Forschung), '좌파 종교개혁운동가'라 불린다. 그
리고 이들은 일찍이 트륄치(Ernst Trocltsch)에 의해 보다 가치중립적인 의
미에서 "소종파"라 명명되기 이전까지는 루터, 불링거(Heinlich Bullinger)에
의해 고착된 분리주의자-재세례파-열광주의-무정부주의자의 도식을
통해 소종파는 일방적으로 기독교의 이단으로 매도당했다. 이들의 절
대적 영향력으로 인해 오랫동안 재세례파의 기원이 뮌처나 츠비카우 예
언자들 같은 광신도들처럼 폭력적인 종교개혁운동, 더 나아가 농민전쟁
과 같은 정치적 반란세력과의 연관 속에서 불온시 되어 왔다. 뮌처의 농
민혁명과 뮌스터(Münster)에서의 폭력적 사례들은 그 당시에 급진적 종
교개혁을 하나의 반란 운동으로 규정지어 그것들을 정죄하기 위한 구실
로 역할 한 것이 사실이다. 뮌스터파 사건 이후 재세례파에 대한 박해는
더욱 극심해졌고 그 여파로 독일 내에서는 재세례파들이 거의 멸문지화
를 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재세례파나 뮌스터에서의 열광주의적
종말론적 성령주의자가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성인세례를 주장했
다 치더라도 주류의 관헌적 (magisterial) 종교개혁운동이 비주류에 속한 종
교개혁운동을 전부 열광주의자나 폭력주의자로 낙인찍은 것은 명백한
오해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량..)
그런데 드립치가 루터를 중심으로 한 초기 종교개혁 패러다임이 근 대적이라기보다는 여전히 중세적 틀에 갇혀 있다고 보면서 부터의 중 교개혁은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지 못하고 여전 히 보수적인 '교회 유형"chuchpe)으로 남아있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 다. 루터파나 칼뱅파의 종교개혁은 고작해야 중세의 교회 지배적 문명 을 완화시킨 정도에서 머물렀을 뿐이라 평가한 것이다. 특히 종교와 사 외에 대한 루터의 견해를 고찰한 부분은 주목할 만하다. 드립치는부터 가 세상의 종말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확신하고 그의 추종자들에게 중 교로 귀의해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역설했던 대단히 보 수적인 인물이었던 것으로 평가했던 것이다. 그는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서의 충성심과 행동을, 세속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그것 들과 구분 지었던 점을 지적함으로써 자신의 명제를 입증했다. 종교적 인간으로서의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사랑의 법과 최고의 영적 이 상(spiritual idcal)에 순종해야 하지만 또한 다른 차원으로 국가의 한 국민 으로서는 비록 그 이상들이 열등한 것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세상의 법 들과 관습들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루터는 그리스도인들 이 세상의 제도들을 피조된 질서의 표현들로 그리고 신의 법은 '태양과 비, 폭풍과 바람을 받아들이듯이 수용하기를 기대했는바 트뢸치는 그 러한 루터 신학이 지배세력의 정치적 권위에 무조건적인 복종을 가르친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펼치는 '소중파 유형이라 분류한 대표적 종교개혁운동인 재세례파와 성령주의자들에게서는 여성이나 가정에서 훨씬 많은 독자
그런데 드립치가 루터를 중심으로 한 초기 종교개혁 패러다임이 근 대적이라기보다는 여전히 중세적 틀에 갇혀 있다고 보면서 부터의 중 교개혁은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지 못하고 여전 히 보수적인 '교회 유형"chuchpe)으로 남아있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 다. 루터파나 칼뱅파의 종교개혁은 고작해야 중세의 교회 지배적 문명 을 완화시킨 정도에서 머물렀을 뿐이라 평가한 것이다. 특히 종교와 사 외에 대한 루터의 견해를 고찰한 부분은 주목할 만하다. 드립치는부터 가 세상의 종말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확신하고 그의 추종자들에게 중 교로 귀의해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역설했던 대단히 보 수적인 인물이었던 것으로 평가했던 것이다. 그는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서의 충성심과 행동을, 세속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그것 들과 구분 지었던 점을 지적함으로써 자신의 명제를 입증했다. 종교적 인간으로서의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사랑의 법과 최고의 영적 이 상(spiritual idcal)에 순종해야 하지만 또한 다른 차원으로 국가의 한 국민 으로서는 비록 그 이상들이 열등한 것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세상의 법 들과 관습들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루터는 그리스도인들 이 세상의 제도들을 피조된 질서의 표현들로 그리고 신의 법은 '태양과 비, 폭풍과 바람을 받아들이듯이 수용하기를 기대했는바 트뢸치는 그 러한 루터 신학이 지배세력의 정치적 권위에 무조건적인 복종을 가르친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펼치는 '소중파 유형이라 분류한 대표적 종교개혁운동인 재세례파와 성령주의자들에게서는 여성이나 가정에서 훨씬 많은 독자
되었다. 이를 통해 주류의 종교개혁자 루터나 츠빙글리가 신약성서의 교회의 참된 모습을 회복하는 데 실제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보기 힘든 반면, 재세례파들은 그리스도의 뜻과 원시적인 사도 교회의 본질에 충 실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 실제적으로 비타협적인 노력 을 경주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벤더는 재세례파의 출발점을 츠비카우가 아니라 취리히라는 점에 대해 이론의 여지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으 며, 재세례파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뮌처가 아니라 츠빙글리를 추종했던 스위스 형제단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재세례파 운동의 두드러 진 특징은 제자도와 서로에 대해 책임적인 자발적으로 세례 받은 자들 로 구성된 교회론, 그리고 사랑과 무저항주의에 대한 강조에 놓여있다. 벤더는 더 나아가 진정한 재세례파는 폭력적인 급진주의나 열광주의와 는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없으며, 마찬가지로 중세 신비주의 전통과 맥 을 같이 하는 바도 없다고 주장했다. 츠빙글리 종교개혁에 연원을 둔 재 세례파는 오직 성서적이고 신학적이며 교회론적으로만 추동된 개혁운 동의 노선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특히 벤더를 중심으로 학과가 형성되어 창간된 「메노나이트 계간 지(Memonite Quarterly Review)는 재세례파 연구에 가장 혁혁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벤더 학파의 일원이었던 윌리엄스(George Williams)의 노작도 간과 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했다. 윌리엄스에 따르면 재세례파의 기원이 폭 력적 열광주의가 아니라 평화주의적인 스위스 형제단에 있다는 연구가 발표되었다. 윌리엄스는 급진 종교개혁운동을 범주화하면서 재세례의 시행 여부뿐 아니라 폭력성과 평화주의의 문제 그리고 교회의 형태가 지역적 권력에 바탕한(territorial) 교회인가 아니면 지역의 권력으로부터 완전 자유로운 교회인가를 범주화의 주요한 기준으로 삼았다." 재세례
25 Harold S. Bender, The Anabaptist Vision, Mennonite Quarterly Review 18(1944), 67-
88
26 George Williams, The Radical Reformation, 23-31.
제9장 재세례-메노나이트의 역사와 연구사 435
5. 결론
재세례-메노파 연구 분야에선 역사와 신학 영역에서의 공헌도가 높은 것이 사실이지만, 점차 다른 학문 분야에서도 공유되는 지형도가 확장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메노파 학자들이 신학과는 상당히 변별 적인 타 학문 분야, 즉 인류학, 민속음악, 사회학, 평화와 분쟁 연구, 또는 회고록이나, 소설, 민속, 시, 그리고 문학비평학과 같은 것을 폭넓게 포 함하는 의미에서의 '메노파 문학'도 학문적인 기여도 높다는 평가를 받 고 있다." 재세례파와 메노파 연구에서 다방면으로 박식한 학자들은 학 문적 논쟁을 다루는 비평 저널이나 온라인 백과사전 그리고 다양한 학 술 네트워크를 참고하여 학문적 발전에서 뒤쳐지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 다. 오늘날의 대학의 대부분의 학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재세례파와 메 노파에서의 지식의 성장은 다양한 학제간연구 관심을 갖는 학자들의 면밀한 학문적 탐색과정이 수반된 매우 전문화된 연구로 발전되고 있 다. 점차로 커지고 있는 이러한 폭넓은 관심과 접근의 확산으로 인해 흑 재세례파와 메노파 연구 영역의 해체를 가져오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도 한다. 니스(Fred Kniss) 는 북미 메노파의 경험과 관련된 이전의 역 사기술적 및 사회학적 방법론에서 두 가지의 근본적인 가정을 관찰한 다. 첫 번째는 16세기 이래로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온 가치, 신앙 및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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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ldi Froese Tiessen, "Homelands, Identity Politics, and the Trace: What Remains for the Mennonite Reader?", Mennonite Quarterly Review 87(1)(2013), 11-22.
제9장 재세례-메노나이트의 역사와 연구사 453
천의 본질적 핵심인 노적 본질이 존재한다는 가정이다. 두번째 는 노파는 주류 대다수의 기독교 교회와 세속 세계에 대항해 이러한 본질적 가치를 보존해왔다"는 가정이다." 니스는 이러한 가정들에 대 해 '본질주의'이자 보존주의자라 언급하며, 그것들은 종종 다른 종교 적 사회적 집단과 비교했을 때 메노파의 본질을 어떻게 가장 잘 서술할 수 있는지 또는 메노는 어떻게 외부 세계에 맞서 경계선을 유지하 는데 성공할 수 있었는지' 물음으로 유도하게 된다고 보았다." 니스 는 가치, 신앙 또는 실천에 대한 합의나 초역사적인 본질 따위는 존재하 지 않는다는 가정들과 메노파와 외부 세계의 경계선은 확고하고 명화 하게 정의할 수도 없으며 그런 것이 유지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사실 유동적이고 취약한 것이라는 가정들에 대해 계속적으로 도전한다. 나 스는 주로 역사학과 사회학의 관점에서 북미 메노파 이야기에 논의를 제한시키고 있지만, 로스(John Roth)는 재세례-메노파 신앙전통의 첫 2 3세기를 특징짓는데 유사한 언어를 사용한다. 그는 메노파의 역사는 신 양적으로 더 충실했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았는가의 2차원적 방식으로 는 제대로 논의될 수 없고, 재세례파 전통 각각이 구체적인 사회 정치 경제 종교적 맥락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던 역동감과 긴박감 그리 고 창의성이 넘치는 상호작용의 방식으로 논의될 때 제대로 파악될 수 있다고 말한다."로스는 역사가의 임무는 어떠한 규범적 신념의 기준에 따라 선별하고 분류하는 대신, 신앙에 대한 규범적 정의가 지속적으로
천의 본질적 핵심인 노적 본질이 존재한다는 가정이다. 두번째 는 노파는 주류 대다수의 기독교 교회와 세속 세계에 대항해 이러한 본질적 가치를 보존해왔다"는 가정이다." 니스는 이러한 가정들에 대 해 '본질주의'이자 보존주의자라 언급하며, 그것들은 종종 다른 종교 적 사회적 집단과 비교했을 때 메노파의 본질을 어떻게 가장 잘 서술할 수 있는지 또는 메노는 어떻게 외부 세계에 맞서 경계선을 유지하 는데 성공할 수 있었는지' 물음으로 유도하게 된다고 보았다." 니스 는 가치, 신앙 또는 실천에 대한 합의나 초역사적인 본질 따위는 존재하 지 않는다는 가정들과 메노파와 외부 세계의 경계선은 확고하고 명화 하게 정의할 수도 없으며 그런 것이 유지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사실 유동적이고 취약한 것이라는 가정들에 대해 계속적으로 도전한다. 나 스는 주로 역사학과 사회학의 관점에서 북미 메노파 이야기에 논의를 제한시키고 있지만, 로스(John Roth)는 재세례-메노파 신앙전통의 첫 2 3세기를 특징짓는데 유사한 언어를 사용한다. 그는 메노파의 역사는 신 양적으로 더 충실했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았는가의 2차원적 방식으로 는 제대로 논의될 수 없고, 재세례파 전통 각각이 구체적인 사회 정치 경제 종교적 맥락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던 역동감과 긴박감 그리 고 창의성이 넘치는 상호작용의 방식으로 논의될 때 제대로 파악될 수 있다고 말한다."로스는 역사가의 임무는 어떠한 규범적 신념의 기준에 따라 선별하고 분류하는 대신, 신앙에 대한 규범적 정의가 지속적으로
형성되고 논쟁되는 방식을 서술함으로써 더 잘 수행될 수 있다고 확신 한다.76
재세례-메노파 영역이 가까운 미래에 어떻게 전개되어갈지를 예측 하기 쉽지 않다. 분명한 것은 대화의 확장을 통한 외연 확장과 더불어 메 노파의 정체성이 약화된다면 메노파가 가졌던 윤리적 강점 역시 약화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와는 달리 오늘날 포스트모던의 세례를 덜 받은 젊은 세대들의 영향력으로 인해, 온고지신의 자세로 과거의 유용성을 추구하고 계승하려는 학문적이고도 공동체적인 삶의 흐름으로 더욱 두 드러질 가능성도 열려있다 하겠다. 재세례-메노파들과의 적극적인 대 화를 통해 우리 종교개혁의 소중한 유산, 나아가 참된 기독교의 정신을 계승하고 보전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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